조용식 감독 - 나비남, 참여자들의 이야기

컴퓨터와 관련된 사업을 꾸려나갔던 조용식 씨는 지인의 사기로 인해 부도, 이를 막기 위해 쓴 사채, 폭력적인 빚 독촉 속에 스스로 사회와 단절을 선택했다. 스스로 생을 끊으려는 시도까지 이르렀던 그는 나비남 프로젝트를 통해 다시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다. 현재 양천푸드뱅크마켓센터에서 일을 하는 동시에 나비남들의 자조모임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며 참여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나비남 프로젝트에 참여하시기 전 고립 속에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씀해주세요.

A. 삶이란 게 낮에는 밖에 나와본 적이 거의 없다고 보시면 돼요.

그러니까 주로 움직이는 시간은 한 새벽 두시에서 세시 사이에 편의점 가서 술을 사다 먹는다던가 아니면 그때 나와서 담배도 피고, 쓰레기 같은 것도 버리고. 그때 가졌던 그 두려움이라는 거는 제가 거기 있는 거를 누가 알 턱이 없는데도, 바람이 불어서 문이 덜컹거리면 ‘누구지?’ 이거부터 생각이 들어요. 근데 감히 문을 열어서 확인해 보지는 못하고. 점점점점 그게 심해지는 거예요.

사채업자에게 당했던 기억들도 이 소리와 함께 같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전에는 방에 불을 안키거나 아니면은 두꺼운 담요로 창을 다 막아버리거나. 그래서 밖에 나가서 보이나 안보이나 확인도 하기도 하고. 혹시라도 괜히 밖에 돌아다니다가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마주칠 수도 있으니까. 밖에 안 나가게 되는 큰 요인이었죠.

Q. 나비남 프로젝트에 참여하시게 된 과정은 어떠셨나요?

A. 양천구에 오기 전 수원의 한 고시원에 있었어요. 손가락을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하면서 월세가 밀렸는데 주인이 사정을 이해해주시고, 배려를 해주셨죠.

그런데 건물이 경매로 넘어가고 새주인이 와서 딱 나가라 하면서 갈데가 없어졌어요.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목사님이 자기 교회로 와 있으라하면서 양천구에 오게됐죠. 그렇게 교회에서 기거하던 가운데 예배드리러 오신 한 분이 신월동 쪽에 명예동장을 하셨던 분이었어요.

마침 구청에서 나비남 프로젝트를 하면서 멘토도 하셨던 분인데 저를 연결시켜주셨죠, 그 계기로 구청과 사회적기업들이 진행한 나비남 공감여행을 가게 됐죠.

사실 그때 마음은 가기 싫었어요. 나가서 여러 사람하고 부닥껴야 되고. 또 굉장히 예민해 있는 상태기 때문에 그런 비슷한 사람이 모여가지고, 부닥칠 것 같기도 했고요.

그래도 동네 복지사분과 대화를 나누고 ‘일단 그냥 갔다오지 뭐’ 해서 가게 됐는데요. 그게 효과가 컸어요. 만약에 그렇게 안됐으면은 지금까지 이렇게 이어져왔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때 이미 반은 이루어졌다고 보면 될 것 같더라고요.

나비남들은 자기를 대하는 태도에 제일 민감하거든요. 항상 상대가 나를 무시한다라는 이런 비슷한 것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요.

그런데 그날, 그분들하고 같이 하루를 지내는 동안에 그 감정이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고, 오히려 같이 하는 게 이렇게 행복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어, 그런 느낌들이었어요. 그래서 그 여행 말미에 앞으로 정서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영화제작 이렇게 진행하겠다라고 안내를 했을 때. “어, 하자” 했죠. 영화 제작까지 참여한 것은 영화가 좋아서 이런 게 아니라. 그냥 뭐든지 이 사람들하고 같이 할 수 있다라는 것 때문이었어요.

특히 정서프로그램 준비하신 분들이 참 대단해요. 뭐가 필요한지를 아시는 분들이더라고요. 그래서 단순한 게임을 해도 그 순간 필요한 게임을 해요.

서로 뭐 나는 누구고 자기를 소개하고 이럴 필요가 없었어요. 그냥 게임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이 사람은 누구고,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떤 어려움을 갖고 있는지를 서로 알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이제 공감과 교감이 되어지더라고요. 저는 그 프로그램 자체가 참 좋았다라고 생각해요.

Q. 또 어떤 프로그램이 좋으셨나요?

A. 서서울예술센터에서의 예술교육과정이 좋았어요. 그 작가분들하고 같이 작업을 하다 보니깐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더라고요.

자화상을 그려보면서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남들한테 내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까라는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생각하며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는 과정들을 경험했어요. 모든 걸 갖다 자기 주관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제대로 보기보다는 많이 왜곡되어 가기도 하잖아요.

본인을 자꾸 들여다보게 하는 시간들이 많이 주어졌던 거 같고, 또 첫 회를 이렇게 하고나서 그다음에 이어지는 것들이 이제는 시선을 돌려서 주위나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지를 볼 수 있는 과정이었던 거 같아요.

신월3동에서 현재 일하고 있는 양천푸드뱅크마켓까지 한 20분 정도 걸어서 출근해요. 프로그램을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오는 길에 뭐가 있었는지 알고 있느냐는 거예요, 오로지 내 생각이나 나에 몰입이 되가지고 왔다갔다 하는 거지, 내 주변에 뭐가 있고,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안쓰고 살았다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돌아보게 되는 게, ‘아 이 사람은 지금 뭐 때문에 힘들어 하는 구나’가 보여지고 이 사람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여기까지 가더라고요. 처음에 시작은 그거였어요.

아무것도 날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에서 시작을 한 거죠. 나 건드리지 마. 아는 체도 하지마 이런 거? 누가 뭐 준다고, 밥 사줄게, 나와 해도 귀찮고 싫은 거예요. 그러다가 내가 알아차리지 못해던 그런 세상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면서 옆에 사람들의 어떤 희노애락을 같이 보고, 또 같이 느끼게 되고 나아가 분담할 수 있는 건 분담하고, 같이 할 수 있는 건 같이 하고 이 나비남 프로젝트 본질 자체가 바로 그런 싸이클이었던 거 같아요.

멘티가 멘토가 되고 다시 멘티가 다시 멘토가 되고 그런 식으로 해서 이제 멘티, 멘토 개념이 이제 없어지는 거죠.

Q. 정말 나비남 프로젝트에 참여하시면서 삶이 변화하셨다고 볼 수 있겠네요.

A. 어떻게 보면, 그렇죠. 왜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말이 있잖아요. 실제로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아주 단적인 예가, 다 도둑놈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라는 것. 진짜 생각 차이 하나더라고요. 충분히, 제가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모두가 다 그렇게 할 수 있다라고 생각이 드는 거고.

물론 사람마다 이제 그 시간 차는 있을 수 있지만, 그렇게, 그걸 목표로 사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나름대로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 거죠. (웃음)

Q. 난타를 하는 ‘별난두드림’이란 자조모임을 하시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나요?

A. 일단은 그 지금 대상들이 혼자 방에서 은둔하던 사람들이에요. 은둔하던 사람들을 일단 집 밖으로 나오게 한 거고, 그때 이제 그 정서적 프로그램이 끝났을 때 같이 하셨던 분들은 아쉬운 거죠.

프로그램을 진행하셨던 분들은 지원받는 것도 끝났으니깐 어떻게 방법이 없잖아요. 그때 그분들한테 분명히 얘기한 게 여기 있는 분들은 지금 끝나면 도로 집으로 돌아간다. 전에 보다 더 깊숙이 들어간다. 그러니깐 이렇게 끝나서는 안된다라는 거죠. 같이 하셨던 분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계속 이어지기를 원한다. 뭐 비용이야 서로 회비를 내서라도 해결하고 장소가 없으면 저 있던 그 교회공간이라도 같이 쓰자 이 정도가 되니깐 재미누리 협동조합 분들도 생각을 돌려서 만들어 보시는 거죠.

그래서 만들어진 장소가 저쪽 신정, 은행정 쪽 책마당이라고 해서 어떻게보면 공동체 개념으로 마을에서 그 공간을 만든 건데 일단 그 공간에서 같이 모임을 할 수 있게끔 얘기가 됐고, 그래서 그때도 일주일에 한 번씩 거기서 모이자. 작년에 그렇게 했죠.

그렇게 하다가 얘기된 게 이제 우리 뭔가 두들기자 해가지고 난타를 제안을 했죠. 기본적으로 같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난타를 하는 것도 사실 뭐 북만 치려고 했던 게 아니라. 뭐 솥뚜껑이라도 갖고 와라. 냄비뚜껑이라도 갖고 와라. 물병이라도 갖고 와라. 그러니깐 “나는 북을 못 쳐. 그래서 같이 못할 것 같애” 이 말 안 나오게 하려고요.

뭐든지 자기가 소리 낼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갖고와서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랬죠. 그래서 어떤 분은 진짜 캐스터네츠, 트라이앵글을 갖고 오신 분도 계셨어요.

함께하고 있는 재미누리협동조합의 송기문 대표가 사회적기업 쪽에 있으니깐 사회적기업 지원센터에서도 많이 관심을 가져주셨어요, 그래서 팀장님이 가끔 와서 밥이나 간식 같은 것도 좀 사주셨죠.

근데 이제 거기도 하나의 단체다 보니깐 뜬금없이 공연 얘기가 나온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조금 황당해했었죠. 공연이라니 (웃음) 우리는 그냥 같이 놀려고 했던 건데.

생각해보면 우리만 그렇게 놀자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이 어르신센터나 이런 데 계신 분들이 더, 이제 외롭고, 그러실 것 같아서 그분들하고 같이 놀 수 있는 꺼리가 난타이기도 했던 거 같아요.

사회적기업 지원센터가 있는 파리공원 쪽에서 9월인가에 처음 공연을 했었죠.

처음 공연하고 나니깐 그 공연을 보러왔던 사람들 중에 센터에서 무슨 행사를 하는데 거기서도 한 번 하면 어떠냐 또 일년에 한 번씩 구청 복지관계자들 모여서 피피티 발표하고 할 때 그런 거 있잖아요.

그거 할 때 와서 공연하라고 제안이 와서 그거까지 총 여섯 번 정도 했던 거 같아요. 지금은 구청에서 뭐 동아리 지원하는 거 시스템이 있어가지고 신청을 해서 선정되어 강사료도 지원 받았네요.

그리고 지원금이 소진이 되었을 때 사회적기업 지원센터에서 팀장님이 오셔가지고 그 강사를 계속 쓸 수 있게 지원을 하겠다 그러면서 또 공연 얘기가 나온 거예요. 그래가지고 아마 9월에 공연을 할 것 같습니다.

Q. 독거남 분들에게 자조모임이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A. 스스로들이 이렇게 원해서 모이는 걸 자조모임이라고 하거든요. 강제적으로 뭐 하니깐 와라가 아니라 스스로 모여서 하게 된 건데 그쪽으로 계속 가면은 바람직하죠.

하나의 큰 그림이 되고 또 큰 그림의 효과물이 되는 거예요, 제가 봤을 때는 저도 그렇고, 참여하시는 분들에게 많이 긍정적인 요소가 됐어요, 저도 처음에 함께 했던 신월 3동 같은 경우는 골목길 입양사업이라고 쓰레기 막 모여 있으면 버려주고 관리를 하는 거죠.

이제 막 쓰레기가 집중적으로 모이는 데 같은 경우는 쓰레기 다 파내고 거기에 화단 조성도 하거든요. 그래서 그 집게하고 쓰레기봉투하고 막 이런 거 저런 거 들고 다니면서 길 청소를 하는데 호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이런 것들도 거의 지금은 이제 자조, 자조모임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나비남의 그 자조모임이 동장하고 협약을 맺어서 시작을 그렇게 했어요. 진행이 되고 동장님도 같이 나가서 청소도 같이 하시고 민관이 같이 그렇게 어우러지는 거죠. 지금은 이제 민관 협치가 많이 중요시되는 거 같더라고요.

주민자치 개념으로 나비남 모임을 생각하면 될 거예요, 한편으로 이런 모임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중요한 게 정서적인 프로그램이 많아져야 돼요.

전에 별별청춘 프로그램 진행했던 것처럼, 그런 게 좀 많아져야 스스로의 자존감이 회복이 되고 또 자기뿐만 아니라 옆에 사람들이 보여지고.

이런 과정이 있어야 그다음에 정말 누구도 신경 안써도 그 스스로들이 해나갈 수 있는 힘들이 생길 수 있고 또 자조모임도 계속 될 수 있는 거죠.

정서가 회복되지 않으면 자꾸 인제 바라기만 하고 나는 뭐 도움을 받아야지만 살 수 있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나는 도와줘야지만 살 수 있는 사람, 이런 식으로. 그니깐 그것이 바꿔지지 않으면 뭘 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Q. 나비남 프로그램이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또 아쉬운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참여자로서 어떤 아쉬운 부분을 느끼셨고, 어떻게 보완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A. 나비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 구청이라는 곳이 이제 관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진행하는 것과 아까 얘기했던 사회적기업과 민간복지관 같은 곳에서 추구하는 거하고는 본질적으로 좀 다른 것들이 있더라고요.

특히 구청이나 이런 데서는 담당자가 누구냐가 중요해요. 사회적기업이나 민간복지관 이런 데서 담당자가 누구던 간에 상관없이 사업이 계속 이어지고 또 그 큰 변화가 없는데 구청같은 경우는 담당자가 바뀌면 끊어져버리고 그래서 이거 어떻게 됐어요라고 물어보면 누락되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고요.

한편으로 이 나비남들 입장에서도 그런 것들은 있어요, 나비남프로젝트라는 것도 결국 사람을 만나는 일인데, 그 대상에 대한 대응 자체를 형식적으로 한다? 그럼 나비남도 형식적으로 대응을 하게 되더라고요.

근데 이제 상대방이 정말 진정성 있게 온다라고 그랬을 때는 나도 내 있는 모든 것들을 털어가지고 만난다는 얘기죠. 나비남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고 관리한다는 점은 필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자칫 그들을 약간 부정적인 느낌의 부류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멘토들의 태도와 관련되기도 하는데 멘토들 중 훌륭하신 분들도 많지만 아직 나비남들을 대하는 태도가 적절하지 못하는 등 감수성이 부족하신 분도 조금 계신 거 같아요.

솔직히 저한테는 이 나비남이라는 말은 무슨 용도에 쓰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에요. 물론 어떤 분이 똑같이 나비남 분들 이렇게 얘기할 때 편안하게 들리는 분도 계셔요.

근데 나비남이라는 걸 언급할 때 굉장히 비하하는 발언처럼 느껴지는 분도 계시는 거예요. 나비남들에게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거죠. 그런 부분들을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Q. 아직 단절되어 있는 나비남 분들에게 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A. ‘나를 주인공으로 살아라’, 그러니깐 내가 중심이지 이제 곁다리는 아니라는 거, 나로 사는 거. 그 말은 꼭 해주고 싶어요. 그래야지 내가 한 거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질 수 있어요.

요것만 확실히 해도 지금보다는 훨씬 행복해질 수 있겠다는 거죠. 그러면 자신감도 붙거든요, 또 뭔가 해보고 싶은 마음도 들죠. 이것도 해보고 싶어지고, 저것도 해보고 싶어지고. 내가 하기 시작했으니깐.

그 기타 처음 배울 때 이 손가락 아파가지고, 손가락 아픈 걸 못참아가지고 그만 두는 경우도 많은 것처럼 모든지 처음에 딱 시작했는데 잘 되어지는 게 어디 없잖아요.

그때는 포기하는 것을 조금 보류하는 것도 괜찮은 거 같아요. 뭔가 할 수 있는 그런 시간들을 스스로한테 좀 주는, 어떤 감정, 욕구 등을 보류하는 연습도 해보면 괜찮을 거 같아요.

일단은 자기 스스로를 좀 다루고 소중하게 존중해주고, 또 자기를 좀 신뢰를 해줬으면 좋겠다라는 거죠. 자조 모임을 하게 된 것도 그러지 못한 태도를 보였을 때 이제 안타깝기 때문인 거죠, 그런 모습이 보이면 어떻게 하면 이게 이렇게 갈 수 있을까란 거에 대해서 방법을 막 찾게 된 거고. 북치고 이런 걸 같이 하면은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한 번 해보고. 뭐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 사람이 반짝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이제 그거를 같이 해서 경험을 더 하고, 더 하다보면 그 사람이 선택한 통로가 될 수 있겠다는 부분이죠. 결국은 하고 싶은 거는 같이 하자는 얘기에요. 나비남 자체가 나는 혼자가 아니야 라는 것처럼, 혼자만 할 수 있는 건 없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