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식 감독 - 나비남, 참여자들의 이야기

나비남 프로젝트가 아니었다면 자기 역시 쓸쓸하게 고독사를 맞이했을 거라 얘기하는 강명진 씨.

나비남 프로젝트가 시작됐던 2017년부터 참여하기 시작했던 그는 자활센터에서 일을 다시 시작 하며 자립에도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는 여전히 나비남 대상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결합하며 일종의 선배로서 주변의 나비남들의 지속적인 참여를 북돋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를 만나 변화의 과정을 직접 들어봤다.

Q. 나비남 프로그램에 참여하시기 전, 10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A. 제가 사업을 했었어요.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났죠. 그걸 막으려고 부모 돈 갖다가 또 썼고, 형제 돈 갖다 썼는데도 못 갚았고. 특히 빚 문제가 컸는데, 지금은 그래도 법이 많이 생겼지만 그때 당시에는 법보다 주먹이었어요. 안맞으려면 숨어 살았어야 됐어요.

또 가족은 볼 면목도 없었고, 처자식이랑 이제 이혼까지 하면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죠. 그때 당시로서는 지하방에서, 큰 방 하나는 창고로, 사람이 안사는 것처럼 만들고, 작은 방에서 조그마한 잠잘 데만 만들고 숨어서 그렇게 생활했어요. 사람이 사는 곳인지 아무도 몰랐어요. 도망자 생활하고 피해 살았죠. 사람 만나기가 그만큼 무서웠으니까요. 그런 생활을 했으니 얼마나 비참하겠어요.

사실 행주대교도 몇 번 갔어요. 그냥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오기도 하고. 몇 번 하기도 하고. 그래도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왔죠, 사실은 죽지 못해 살았던 거예요, 생계는 말 그대로 그냥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았죠.

조금이라도 돈을 벌긴 벌었어야 했는데 밤에 이제 멀리 나가서 일을 했죠. 우유배달, 신문배달 이런 걸 주로 했어요. 그것도 이제 만약에 누가 보면 못하고 그랬죠. 아니면 이제 누가 용돈 좀 주면 그걸로 이제 술 한 병 사갖고, 한 5만원 있으면 그거 갖고 한 달 버티거든요. 알콜로 버티고 없으면 또 굶고 그런 식으로 버텨 온 거예요 그렇게. 그러니까 그때 당시로서는 사람이 사는 꼴이 아니었어요. 그냥 죽지 못해 사는 사람 꼴이었으니까요.

Q. 은둔생활을 하시다가 다시 이렇게 사회로 복귀하시게 된 과정은 어떠하셨나요?

A. 그 전에 동사무소 복지팀에서 몇 번 쌀 4키로 짜리 가지고, 제가 살고 있던 그 지하방에 있는 방문을 했어요. 근데 이제 몇 번 왔지만 제가 문을 안 열어줬죠. 그런데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문을 열어줬어요.

지금 50스타트센터 담당으로 계신 그 김화진 주무관이 원래는 신월1동 복지팀에 계셨는데 그때 만난 거죠. 그러면서 우리가 지금 시작되게 된 것이 공감여행이었어요. 그걸 통해서 이제 나비남 영화제까지 참석하게 됐어요. 참석하고 나서 바꿔졌던 건 그때 당시까지는 은둔하고 숨어살던 그런 생활에서 이제 밖에서 나오게 된 거죠. 특히 그 영화를 만들고 나서는 딱 밖에 나와서 생활하는 그런 시스템이 되어 갔죠. 처음에 할 때는 이제 (조)용식이하고 둘이 시작을 했는데 3년이 지난 지금은 7, 8명? 그 인원이 이렇게 늘어나서 같이 하고 있죠.

Q. 영화제도 그렇고 또 참여하셨던 행사 중 마음에 들었던 프로그램은 무엇인가요?

A. 그 재미누리협동조합에 송기문 대표가 했던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는 놀이게임이 있었어요. 넘어트리는 볼링게임이었는데, 그걸 이제 함으로 인해서 거기에 이제 사람들이 같이 웃고 즐기게 된 거에요.

그 놀이게임이 우리와 같은 나이또래들하고 같이 어울려줬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풀어줬고, 그로 인해 시작을 할 수 있었죠. 또 손편지를 작성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죠. 그걸 갖다가 쓰면서 속에 있던 모든 그 과거에 대한 내용까지도 편지를 쓰고 또 함께 공유하면서 이제 많이 울었죠. 그 두 가지가 많이 기억에 남았어요. 아무래도 우리 마음이 함께 어우러졌던 계기였기 때문이죠.

Q.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프로그램에 계속 참여하시고 또 자조모임까지도 계속 활동을 이어나가신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우선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만났던 용식이라는 동생이 있었기 때문인 거 같아요. 프로그램 참여를 두고, 그 동생하고 마치 선의의 경쟁 아닌 경쟁이 있었던 거 같아요.

어쨌튼 고립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마음이 같이 통했기 때문에 끝까지 마칠 수 있었던 거 같고요.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뜻이 맞았고, 함께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거예요. 서로 의지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가는 거죠. 서로 혼자 있을 때는 외로우니까. 전화가 오면은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먹으면서 이제 속에 있는 이야기, 또 어려운 이야기 이제 이런 이야기들 서로 의논하면서 그렇게 생활했고, 나아가 이제 주변에 같이 또 참여하는 사람들하고도 그렇게 만나갔고 그런 식으로 지금 만남을 같이 이어나가고 있어요. 어려운 부분들을 같이 도와가면서 그렇게 이어가는 거죠.

지금 그 형님 동생 그런 분들도 사실은 어려움이 많잖아요. 이제 함께 하면서 서로 의지를 해요. 같이 이렇게 만나서, 어려운 부분은 서로 의논도 하고. 그러면 또 우리가 그 난타 동아리(별난두드림)를 만들었기 때문에 똑같이 활동을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좋은 것 같아요 어쨌든. 또 생각해보면 우리처럼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우리는 그런 분들에게 조금씩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로, 우리가 그런 역할을 또 이제 해야 된다고 보죠.

그렇기에 저도 이 활동을 또 계속 하고 있는 것이죠.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그때 당시 나 같은 사람들을 어쨌든 간에 찾아내서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다른 분들에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거죠. 어쩌면 우리의 활동으로 그런 사람들한테 희망적인 메시지를 갖다가 주는 거 아닐까요? 현재 나비남 영화 프로젝트에 또 참여했던 것은 그런 희망을 주기위해 만들고 있는 거 같아요. 한편으로 강사 분들의 역할도 큰 거 같아요.

특히 나비남영화제 강사로 활동하시는 박철우, 유동흔 씨하고 형님, 동생으로 지내고 있을 정도로 계속 만남을 이어왔어요. 형님 동생으로 해서 끝까지 함께 가자고. 그러니깐 그 강사 분들도 그렇게 이제 많이 신경 쓰고 계시죠. 명랑캠페인의 오호진 대표도 마찬가지로 많이 신경써주고 계시고요. 특히 그분들은 저희가 겪어왔던 어려운 상황을 영화제 교육을 하면서 또 알게 되셨으니깐요. 지금은 도움을 주고받고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Q. 나비남 프로젝트에 참여하신 이후 자활센터에서도 일을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A. 그렇죠. 나비남 하면서 이제 자활이라는 곳도 알게 되어서 그곳에서 이제 2개월 정도 우리가 또 교육을 받았어요.

지금 일하고 있는 것도 자활 택배에서 직장까지 이제 알선해줘갖고 직장생활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 전보다는 힘이 덜 드는 거 같아요. 사실 그전에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 밤 일을 하기도 했는데. 그러니깐 주야간이 없었어요. 말 그대로 이보다도 더 힘들어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무것도 아니죠. 지금은 뭐 잠이던지 편히 잘 수가 있고. 지금 이 일은 예전 일과 비교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Q. 자조모임 외에도 또 다른 곳에서도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A. 우리 신월 1동 같은 경우는 이웃살피미, 나눔살피미라고 활동할 수도 있는 그런 모임이 있어요.

거기에 이제 또 나비남 사람들하고 함께 할 수가 있고요. 또 아까 말씀드렸던 자활센터를 통해 택배 일을 하는 것도 나비남 사업이라고 하네요. 말 그대로 조건부수급자들, 차상위그룹, 그리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그런 데로 오셔서 일을 한다는 것이죠.

다 모여서 또 처지가 서로 비슷하니 어려운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모임을 하고 계속 활동을 하죠. 활동이 그런 식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거죠. 아무래도 주도적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이제 용식이랑 나랑 어차피 1회부터 활동을 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계속 모임뿐만 아니고 여기서 더 식구를 늘려가는 거 같아요.

우리는 이제 두 사람이 시작했지만 작년 같은 경우는 다섯 사람, 일곱 사람. 지금은 아홉 사람, 열 사람. 이런 식으로 인원이 늘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년에는 이제 더 많이 늘어나겠죠? 왜 그러냐면 이제 홍보라는 것이 계속 입에 입을 통해 하더니 더 전달 될 거 아니에요. 전달되면 50스타트센터가 있는 줄 알고 하니까. 여기에서도 운영되는 프로그램이 있고, 저쪽에서도 또 다른 프로그램도 있죠. 그 프로그램에서 나비남들이 활동을 또 하고 있으니까.

계속 홍보는 잘되면 내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또 활동을 하겠지. 이제 그런 식으로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 이렇게 뭉쳐지니까 더 힘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그러니 그런 면에서 좋아요.

Q. 말씀하셨지만 50스타트 센터가 많은 분들이 이용할 수 있는 거점이 된 거 같습니다.

A. 아 공간 있으니깐 좋죠. 그냥 쉬고 싶을 때 거기 갈 수도 있고, 사람도 만나고 대화할 수 있고, 이제 그런 것은 정말 좋았어요.

그 뭐 전국에서 여기 밖에 양천구밖에 없다고 하니깐 우리가 힘이 어느 정도 더 받는 거 같기도 하고요. 저는 시골 내려가서 우리가 그런 공간을 이용한다는 거 갖고 자랑도 해요.

우리는 나비남센터도 있고, 거기에서 인제 우리가 만나면서 공유도 한다 그거에요. 또 같이 이야기 나눌 때 먹는 차도 싸고. 좀 이런 것이 다른 구에서도, 말 그대로 많이 생기면은 더 좋겠죠?

어쨌든 나는 저걸 이용해보니 좋으니깐 다른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죠. 다만 아쉬운 게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게 좀 아쉬워요.

오후 6시면 퇴근 시간에 맞춰 끝나는 데, 일을 하고 있는 우리 같은 경우는, 그냥 말 그대로 노는 사람들이 아닌데. 일하고 나서 끝나고 저녁에 그 공간에 만날 수가 없는 거죠.

더 이상 뭐 저기에 공간에 있을 시간이 없으니깐 참 아쉬어요. 그런 게 좀 바뀌면 좋겠어요. 좀 사람이 거기에 결합해서, 좀 시간을 늘려 공간을 잘 활용하고, 이용하는 방향이면 좋겠네요.

Q. 공간도 그렇지만 나비남 프로젝트에서도 장점과 더불어 아쉬운 점도 있으실까요?

A. 아무래도 고립에서 벗어난 케이스로, 방송도 많이 나오게 되었어요. 우리가 거기서 활동을 많이 하니깐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다 먹여살려준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우리가 노력하는 부분이 더 많아요.

어려운 부분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왜 그러냐면은 나와서 인제 생활하다보니깐 우리가 숨어살 때는 5만원, 7만원으로 버틸 수가 있었으면 지금 나와서 다시 생활하다 보면 사람 만나는 대인관계 이거 아니면 먹고 살다보면 이게 다 돈이고, 경제적인 게 부딪히는 거예요. 아직까지 우리가 자활해서 거둔 돈 갖고는 살기가 힘든 게 있죠. 그러니깐 지원이 1회적인 게 아니고, 계속적으로 나와서 활동할 수 있게끔, 끝까지 관심을 가져주고, 또 어느 정도 정착할 때까지는 행정적으로 뒷받침을 해주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한편으로 담당자 분들이 발령을 받아 갑자기 바뀌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그러다 보니깐 뭐가 일관되게 이루어지기 보다는 새로운 분들이 오시고 다시금 업무를 파악하고 그러다보니 맥이 끊기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담당자와 나비남들이 계속 유대관계를 맺고 지속할 수 있도록 이런 부분 역시 보완되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용식이와 저는 우리는 신용불량자인데, 이 신용을 회복할 수 있게끔 계속 마무리까지도 해줬으면 좋겠어요. 신용회복에 대해서는 현재 금융상담을 통해 절차 정도를 안내받고, 우리들이 직접 신용 회복하라 이런 식으로 되고 있어요.

그런데 저희는 돈도 없고 또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요. 신용회복을 위해 필요한 서류가 뭐 43가지라는데, 사실 자활에서 하는 일을 하다보면 그 서류를 혼자서 스스로 떼어갈 시간이 없어요. 그런 부분에 대해 보완과 배려가 필요할 것 같아요.

Q. 마지막으로 비슷한 처지에 있지만 아직도 고립되어 있는 주변 나비남 분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저는 나비남 영화를 만들 때마다 그런 이야기를 해요. 혼자 있으면 나비남이지만 어찌됐든 간에 손을 잡으면 그때부터는 무리가 되고 함께 갈 수 있다고. 저는 그 손을 잡고 나오라는 거예요,

그냥. 밖으로 나오면 어찌됐든 간에 그 뒤에는 누가 되든지 간에 계속 도움을 줄 수 있는 우리가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힘을 얻어야지 그냥 처박혀있지 말자는 거죠. 밖에 뭐든지 나오라는 쪽으로 해야죠. 혼자 있으면 계속 나비남이 되고 외롭고 고독하지만 어쨌든 나오면 그때는 둘이가 되고 셋이 되고 함께 할 수 있으니까.

저의 경우, 복지팀이 왔을 때 문을 열어준 건 그냥 문만 열어준 게 아니라 마음의 문도 같이 열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일단은 다른 나비남들도 복지팀들이 찾아와서 노크할 때 그냥 문 열어주고, 손 잡고 나오라고 해요.

아시다시피 이게 사실은 고독사 문제잖아요. 고립되어 있으면 혼자 이제 그렇게 말 그대로 비참한 죽음을 많이 당하니까. 저도 이제 만약에 여기 안나왔으면 어떻게 될지 몰랐을 거예요. 뭐 술 먹고 쓰러지고 그냥 잘못되면 죽어도 모르니까. 그런 것 보다는 어찌됐든 간에 좀 밖으로 나왔으면 좋겠어요.

50스타트센터 같은 곳도 생겼잖아요. 여기 와서 커피 한잔 먹고 놀더라도 나오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활동을 하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나와서 활동하라고. 밖으로 나오기를 바래요.